쓰가루 노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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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노부아키는 히로사키 번의 5대 다이묘로, 1719년에 태어나 1746년에 사망했다. 그는 1731년 조부 쓰가루 노부히사가 은퇴하면서 가문을 계승했지만, 선대 다이묘의 낭비와 잦은 자연재해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노부아키는 검약령과 쌀 대여 제도를 시행하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1746년 히로사키 성하 마을의 대화재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은 좌절되었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 노부야스가 다이묘가 되었고, 노부히사가 섭정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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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노부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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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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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쓰가루 노부아키 |
일본어 이름 | 쓰가루 노부아키 (津軽 信著) |
출생 | 1719년 4월 16일 |
사망 | 1744년 7월 5일 |
사망 장소 | 히로사키, 일본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가쓰치요 (勝千代, 어린 시절 이름)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 우에노의 진료인 |
묘소 (추가) | 아오모리현히로사키시의 초쇼사 |
정치 | |
직업 | 다이묘 |
봉록 | 히로사키 번 번주 (1731년–1744년) |
주군 | 도쿠가와 요시무네 |
관위 | 종5위데와노카미 |
이전 | 쓰가루 노부히사 |
계승 | 쓰가루 노부야스 |
가족 | |
배우자 | 구루메 번 다이묘 아리마 노부후사의 딸 |
어머니 | 고노에 이에히로의 딸 |
아버지 | 쓰가루 노부오키 |
자녀 | 노부야스, 센고쿠 요시후루 |
기타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계명 | 겐큐인덴 신도묘인 다이코지 |
2. 생애
교호 4년(1719년) 히로사키 번 5대 다이묘 쓰가루 노부히사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쓰가루 노부오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30년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이듬해인 1731년 할아버지 노부히사의 후계자(적손, 嫡孫)가 되었다. 같은 해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오메미에(공식 알현)하였고, 5월 16일 할아버지 노부히사가 은퇴함에 따라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이어받아 6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종5위하 데와노카미(出羽守)에 서임되었다.
노부아키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번의 실권은 은퇴한 할아버지 노부히사가 계속 장악했다. 초기에는 번이 번성했으나, 선대 번주였던 노부히사의 낭비와 연이은 자연재해(홍수, 가뭄, 지진, 이와키 산 등의 화산 폭발, 쓰나미, 흉작 등)로 인해 번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졌다. 이는 광범위한 기근과 질병으로 이어졌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 역시 교호 개혁을 추진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히로사키 번에 별다른 원조를 제공하기 어려웠다.
노부아키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논 개발과 관개 시설 확충에 힘쓰고, 란가쿠 연구를 장려하는 등 번의 문제와 부채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엔쿄 원년(1744년) 5월 11일, 히로사키성 아래 성하 마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노부아키는 이 화재 발생 2주 후인 같은 해 5월 25일 병으로 쓰러져 2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노부아키 사후, 할아버지 노부히사는 노부아키의 장남 쓰가루 노부야스(당시 6세)를 7대 번주로 세우고 자신이 섭정이 되어 실권을 행사했으나, 1746년 3월 10일 사망했다.
노부아키의 무덤은 도쿄도 다이토구에 있는 간에이-지의 자원(子院)인 신료인(津梁院)과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있는 쓰가루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인 조쇼지(長勝寺)에 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교호 4년(1719년) 2월 27일, 히로사키 번 5대 다이묘 쓰가루 노부히사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쓰가루 노부오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호 15년(1730년), 아버지 노부오키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교호 16년(1731년) 1월 22일 할아버지 노부히사의 적손(嫡孫, 후계자)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15일에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오메미에(御目見, 공식 알현)하였다.1731년 5월 16일, 할아버지 노부히사가 은퇴하면서 13세의 어린 나이로 가독(家督)을 이어받아 히로사키 번의 6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종5위하 데와노카미(出羽守)에 서임되었다.
하지만 노부아키가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번의 실질적인 권력은 은퇴한 할아버지 노부히사가 계속해서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히로사키 번의 재정은 선대 번주였던 노부히사의 낭비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이미 어려운 상태였다. 더구나 검소함을 강조하며 교호 개혁을 추진하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노부히사의 평판은 좋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노부아키에게 가독을 상속시킨 것이 사실상 막부로부터의 징벌적인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2. 2. 번정 개혁 추진
초기에는 비교적 유복했던 히로사키번의 재정이었지만, 선대 번주 노부히사의 낭비와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해 노부아키가 번을 계승할 무렵에는 재정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노부히사의 낭비는 막부에도 알려져, 검약을 강조하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노부히사가 어린 노부아키에게 가독을 물려준 것이 막부의 징벌적 조치였다는 설도 전해진다.노부아키의 치세 동안 히로사키번은 불운하게도 수많은 재난에 시달렸다. 홍수, 가뭄, 이와키 산과 홋카이도 화산 폭발, 마쓰마에오시마 분화에 따른 쓰나미 피해, 에조치 우스산 분화 영향으로 인한 잦은 지진, 역병 유행, 해충 발생, 히로사키 성하 마을과 아오모리정의 대화재, 잦은 흉작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러한 재난은 광범위한 기근과 질병으로 이어져 영지 내 백성들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고, 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 역시 재정 위기를 겪으며 교호 개혁을 시행하고 있었기에 히로사키번에 별다른 원조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부아키는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13세에 번주가 되었기에 초기에는 선대의 가신과 제도를 유지했지만, 15세 무렵부터는 가신을 교체하며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은 당시 막부의 교호 개혁 방향을 따라 검약령과 쌀 대여 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번사들에게는 검약령을 내려 복식을 간소화하게 하고 낭비를 줄이도록 했다. 재해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유한 상인 등으로부터 어용금을 징수하여 지원했다. 또한, 성 아래에 소송 상자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수렴하고자 했다. 새로운 논 개발과 관개 시설 확충에도 힘썼으며, 란가쿠를 중심으로 학문과 무예를 장려하는 등 단순히 긴축 정책에만 머무르지 않고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이는 막부에 대한 아첨이라기보다는 당시 전국적인 개혁의 흐름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난은 계속되었고, 1746년 5월 11일 히로사키의 성하 마을이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노부아키는 이 화재 발생 2주 후 병으로 쓰러져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3. 개혁의 좌절과 죽음
쓰가루 노부히사의 낭비와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해 히로사키 번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번은 홍수, 가뭄, 지진, 화산 폭발(이와키 산 등), 쓰나미, 악천후, 잦은 흉작에 시달렸고, 이는 광범위한 기근과 질병으로 이어졌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 역시 교호 개혁을 추진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히로사키 번에 원조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쓰가루 노부아키는 새로운 논을 개발하고 관개 시설을 확충했으며, 번의 문제와 늘어나는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란가쿠 연구를 장려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엔쿄 원년(1744년 5월 11일), 히로사키성 아래 성하 마을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화재 발생 직후인 같은 해 5월 25일, 노부아키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추진하던 번의 개혁은 결국 좌절되었다. 그의 사후 번주 자리는 장남인 쓰가루 노부야스가 계승했다.
3. 계보
4. 헨세키(偏諱)를 받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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